주택시장에도 ‘90년대생’들이 온다 ① [김현아의 시티라이브]
고밀·고층 1세대 아파트, 1990년대 1기신도시에 집중 건설
대출 없이 장만한 중산층 주택, IMF 당시 자영업 마중물 역할
[김현아 여의도연구원 경제정책센터장] 최근 우리 사회 곳곳에 ‘MZ세대’(1981~1995년생인 밀레니얼 세대와 1996~2012년생인 Z세대를 묶어 부르는 신조어)에 대한 관심이 크다. 이들은 상대적으로 이전 세대에 비해 부모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에서 자랐으며 강한 개인주의 성향이 있다고 분석된다. 이들 중 특히 사회에 갓 진입한 90년대 생들을 따로 뽑아 그들의 특성을 규정짓기도 한다.
이들은 정치적 성향도, 노동조합에 참여하는 방식도, 재테크에 임하는 방식도 그들 부모세대와 사뭇 다르다. 누군가는 ‘이기주의’라고 말하지만 이들에게 이기주의나 개인주의란 ‘나 자신을 돌보는 것’으로 정의된다. 이들 세대를 자녀로 둔 기성세대는 이들로부터 새로운 삶의 방식을 배우기도 하고, 이들의 이런 성향 때문에 힘들기도 하다. 부모세대에 당연했던 것이 이들 세대에는 하나도 당연하지 않기 때문이다.
주택시장에도 MZ세대가 있다. 특히 1990년대에 지어진 아파트인 ‘1기 신도시 아파트’를 설명하고자 한다. 90년대 아파트는 아파트 대중화가 시작되는 기점에 지어졌다. 이전까지 연간 아파트 건설규모는 최대 20만호를 넘지 못했다. 기술도 자금도 턱없이 부족했고 아파트를 건설하기 위한 택지도 부족했기 때문이다.
1980년대에는 주택공사를 중심으로 수입된 공동주택건설기술이 민간기업에 전수되면서 민간기업들도 일명 ‘맨션 아파트’ 공급에 나섰지만, 그 규모가 크지 않았다. 대규모 아파트를 건설하려면 인프라 공급이 갖춰져 있는 등 그것이 가능한 택지공급이 선행돼야 하는데 민간이 조성하는 택지는 그렇지 못했다.
택지개발촉진법은 이런 한계를 극복하고 공공이 택지개발 전면에 나서기 위해 만들어진 특별법이다. 택지개발촉진법 하에 1기 신도시 건설(200만호 주택건설)을 시작으로 대규모의 택지공급이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이는 민간기업들이 아파트 대량생산의 기반을 닦을 수 있었던 기회이기도 했다. 1998년 IMF 위기 때 많이 도산했지만, 이름만 대면 알만한 아파트 전문건설기업들이 모두 이 시기에 탄생했다. 공공임대 아파트도 80년대 말부터 본격적으로 대량 공급됐으니 이들 주택들 대부분은 90년대 생에 속한다. 그렇다면 90년대 지어진 아파트는 이전 아파트와 어떻게 다를까?
고층 고밀 아파트의 시작
1980년대까지는 저층 저밀 아파트 공급이 주류를 이뤘다. 1970년대 정부는 특정지구개발에 관한 임시조치법을 통해 서울의 반포, 잠실, 여의도, 압구정 등 아파트지구를 지정하고 아파트 건설에 적합한 단지형 택지를 공급하기에 이른다. 당시엔 고층 아파트 건설기술이 부족하기도 했지만 주택모기지나 프로젝트파이낸싱(PF) 건설자금 등 금융도 취약했기 때문에 이 때 지어진 아파트는 저층 저밀일 수밖에 없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급격한 서울 인구집중과 고도성장으로 인한 중산층 증가 현상은 서울의 주택부족 문제를 심화시켰으며 결국 정부는 200만호 주택공급계획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정부입장에선 공급의 속도나 규모로 봤을 때 서울보다는 경기도가 유리했으며, 이 시기 집값 급등의 심각성을 고려할 때 고밀 고층 개발이 불가피했다. 200만호 주택공급계획에 따라 지어진 90년대 아파트 대부분은 15~24층 이하의 고층 아파트들이다. 5개 1기 신도시들의 평균 용적률은 167%~225%로, 이는 기존 서울 5층 아파트 용적률(90~120%)의 1.5배에서 2배 가까이 된다.
IMF 외환위기, 중산층의 자산으로 등장한 아파트
그 당시도 집값은 매우 비쌌다. 게다가 1990년대까지만 해도 은행을 통한 개인대출은 매우 엄격했으며 은행들의 수신대상은 대부분 기업이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수요자들이 ‘내 집 마련’을 했을까? 그때는 저축과 전세제도가 주택의 사금융 역할을 했다. 워낙 고도성장을 하던 시기였으므로 은행의 예금금리는 8~9%였고 개인 간 사채 이자는 두자릿수가 넘었다. ‘사채’라는 어감이 부정적이지만 그 시대에는 개인 간 채무관계가 잦았으며 그만큼 사기, 미상환에 의한 다툼과 분쟁도 많았다.
금융제도가 미비했기 때문에 개인이 저축을 통해 내 집 마련을 할 수 밖에 없었고, 전세제도 역시 내 집 마련의 전초단계로서 저축된 돈을 지키는 수단이었다. 이는 반대로 자가 소유자의 대출이 많지 않았음을 설명한다. 즉, 대출을 통해서 집을 먼저 사고 나중에 갚는 것이 아니라 저축을 한 이후에 주택을 구입했던 것이다. 그래서 내 집 마련의 평균 연령은 40대 중반을 훨씬 넘었다.
1998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는 대한민국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고, 중상층이 무너지는 1차 쇼크이기도 했다. 고공행진을 하던 집값이 폭락했고, 고용시장에서 퇴출한 직장인도 무수히 많았다. 이들은 직장에서 퇴직한 뒤 자영업으로 많이 이동했는데 이때 이들의 창업에 마중물이 되어주었던 것이 바로 자기가 살고 있는 집(아파트)이었다. (다음 편에 계속)
필자는…
20대 국회의원을 지낸 김현아 여의도연구원 경제정책센터장은 현재 경기도 고양정 국민의힘 당협위원장이자 가천대 사회정책대학원 초빙교수를 맡고 있다. 도시계획학 박사인 그는 정치권에서 손꼽히는 부동산 전문가로 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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